“엄마랑은 말이 안 통해.”
“뭐가 문제냐고 물어보는데, 그냥 짜증 나서 말하기 싫어요.”
“그냥… 다 싫어요.”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들은 이처럼 막막한 문장과 마주하는 일이 많다.
아이에게 뭔가 말 걸면 짧게 “몰라요”, “그냥요”로 끝나고,
이야기를 더 이어가려 하면 오히려 짜증을 내거나 자리를 피한다.
부모는 답답하고, 아이는 닫혀 있고, 대화는 막혀 있다.
정말 아이들은 말이 안 통하는 걸까?
혹시, ‘말’이 아니라 ‘감정’을 말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감정을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
많은 아이들은 감정을 겪는다.
하지만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
“짜증 나.”
“화나.”
“슬퍼.”
이 세 가지 외에,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아이는 드물다.
불편함, 억울함, 당황스러움, 서운함, 모멸감, 혼란스러움…
이 감정들은 모두 다르고, 정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대부분의 아이는 그것을 말로 구분해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감정 어휘의 부족 = 자기 감정에 대한 무지
정서심리학에서는 감정 어휘 수준이 곧 감정 조절 능력과 연결된다고 본다.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이름 붙일 수 있어야,
그 감정을 외부로부터 분리하고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을 ‘말로 번역하는 훈련’을 받은 적 없는 아이들은,
막연한 불편함을 통째로 짜증, 화, 혹은 침묵으로 표현하게 된다.
즉, 아이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말을 몰라서” 못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부모가 흔히 놓치는 두 가지 착각
첫째, “말을 안 하니까 생각도 없는 거야.”
둘째,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이 두 가지 오해는 부모를 더 단정적으로 만들고,
아이는 점점 더 입을 닫는다.
아이들은 말이 없지만, 감정은 있다.
다만, 그 감정을 꺼내기 위해 필요한 도구 – 바로 언어가 없을 뿐이다.
감정을 말하는 법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만 가능한 기술이다.
감정 언어를 배우지 못한 시대의 아이들
지금의 아이들은 SNS, 단문 메시지, 이모지에 익숙한 세대다.
이들은 감정을 글보다 ‘짧은 기호’로 표현한다.
‘ㅠㅠ’, ‘화남’, ‘하…’, ‘ㅎ’, ‘ㅋㅋ’, 혹은 아예 말 없는 채팅.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긴 문장보다 반응 위주의 표현에 익숙하다.
그리고 부모와의 대화에서는 그 방식이 통하지 않기에,
침묵, 회피, 짜증이 유일한 도구로 자리 잡는다.
이건 게으름이나 무례함이 아니다.
그저 정서적으로 표현할 언어의 빈곤이다.
부모는 감정 언어의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
아이와 대화가 막힐 때,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감정을 끌어내는 번역가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몰라요”라고 말할 때, 그 안에 담긴 건 정말 무지함이 아닐 수 있다.
그 말은 어쩌면 이런 감정일 수도 있다.
“지금 설명하려고 하면 더 속상할 것 같아서 그냥 몰라요라고 한 거예요.”
이때 부모는 이렇게 되물어줄 수 있다.
“그게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속상한 건지 헷갈리는 기분이야?”
“그냥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일 수도 있지?”
“그런 감정이 드는 거 자체가 힘들었을 것 같아.”
이런 언어는 아이가
‘아, 내 감정은 이런 식으로 말로 표현할 수 있구나’
‘엄마는 내가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하려는 사람이구나’
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다.
감정을 묻는 질문은 이렇게 해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는 “왜 그랬어?”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은 원인을 요구하는 ‘분석형 질문’이고,
아이를 더 위축되게 만들 수 있다.
보다 나은 질문은 감정에 기반한 질문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그 상황이 너한테 어떤 느낌이었는지 설명해줄래?”
“그 순간, 네 안에서 제일 크게 느껴졌던 감정은 뭐야?”
이러한 질문은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천천히 바라보고,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조립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사례- 말이 없는 아이, 감정을 이해받을 때 말문이 트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 서연이는 상담실에 처음 온 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낯선 공간에 들어선 그녀는 가방을 꼭 쥔 채 구석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담임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서연이는 교실에서도 조용하고, 질문을 해도 대답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는 “원래부터 무뚝뚝한 아이다”, “자기 표현을 싫어한다”고 말했지만, 상담 의뢰를 하면서는 걱정스레 덧붙였다.
“요즘엔 집에서도 대화가 거의 없어요. 방에만 있어요.”
상담자는 서연이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냥 함께 색연필을 정리하거나 책상을 닦는 등 가벼운 활동부터 시작했다.
1회기, 2회기 동안 서연이는 고개만 끄덕이거나, 작게 “네…”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담자는 책상에 놓인 그녀의 노트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 노트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도 그냥… 힘들었다.”
그 문장을 읽으며 상담자는 조용히 말했다.
“그 말, 눈으로만 봤는데 마음이 좀 아프네. 힘들다는 말… 아무나 못 쓰는 말이거든.”
서연이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상담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들었다는 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지만 서연이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상담자는 서연이의 침묵을 탓하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조용히 그녀의 노트 옆에 연필을 놓고, 다음 문장을 적었다.
“언제든 괜찮아. 준비되면 이야기해도 돼. 네 말은 여기서 기다릴 수 있어.”
그날 이후 서연이는 상담이 끝난 후 상담자 책상 위에 짧은 메모를 남기기 시작했다.
“친구가 나 없이 단톡방 만들었어요.”
“엄마는 내가 말 안 한다고 혼나요.”
“그냥… 나도 말하고 싶은데 말할 줄을 몰라요.”
4회기, 상담자는 메모를 한 장 한 장 소중히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서연이가 남긴 이 말들, 전부 서연이의 언어야.
이 말들이 말로 나오지 않아도, 여기에 다 담겨 있어.
내가 잘 들었어.”
서연이는 처음으로 상담자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말하려고 했는데… 무서웠어요. 틀릴까 봐요.”
“그냥 말하는 것 자체가 어색했어요.”
이후 서연이는 짧은 문장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나쁘진 않았어요.”
“아까 기분 나빴는데, 지금은 좀 괜찮아요.”
엄마는 아이의 변화를 보고 “이제야 아이가 내 앞에서도 조금씩 이야기해요.
내가 그동안 아이에게 ‘왜 말 안 해?’라는 말로 부담만 줬던 것 같아요.”라고 했다.
이 사례의 포인트
- 말이 없는 아이는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표현 경험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 상담자는 기다림과 수용의 자세, 언어 이전의 감정 이해를 통해 아이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 아이는 말보다 글과 눈빛, 메모로 먼저 자기 감정을 표현했고, 이는 서서히 대화로 이어졌습니다.
- 부모 역시 말 없는 아이를 ‘닫힌 존재’로 보기보다, 감정을 번역해줄 사람으로서의 태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감정 표현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배우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통역되지 않을 뿐이다.
아이들은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감정은 감정으로 이해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말로 정리해주는 경험을 통해
아이는 ‘감정을 말할 수 있는 아이’로 성장한다.
부모가 아이의 감정 언어를 번역해주는 존재가 된다면,
“말이 안 통해요”라는 말은
“말이 통해요, 드디어요.”로 바뀌게 된다.청소년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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