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정을 나누지 않는 집: 아이는 그 속에서 자란다
“네가 힘들다고 해도, 엄마는 반응하지 않아.”
어떤 아이들은 이런 말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합니다. 감정 표현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고, 허락받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서적 회피형 부모는 감정 표현을 꺼려하고, 자녀의 감정을 다루는 데에도 미숙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의 내면에는 과거의 상처와 감정을 억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기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정서적 회피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 대물림을 끊기 위한 실천 방안을 상담 사례와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살펴봅니다.
2. 정서적 회피 부모란?
**정서적 회피(emotional avoidance)**는 흔히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눌러두려는 습관
- 자녀의 감정을 불편해함 (“울 필요 없어”, “괜찮아, 아무 일도 아냐”)
- 표정이 무뚝뚝하고, 자주 “그런 건 별일 아니다”라는 말 사용
- 갈등이나 감정적 상황을 피하려는 성향
- 자녀의 감정에 무관심하거나 과민하게 반응
이러한 부모는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온 시간이 길기 때문에, 아이가 슬퍼하거나 분노를 표출할 때 적절히 반응하지 못합니다. 감정은 위험하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간주되고, 결국 집안 분위기는 감정 표현이 억제되는 공간이 되어버립니다.
3. 정서적 회피의 뿌리: 부모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
정서적 회피형 부모는 대부분 어린 시절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 “울면 혼났어요”
- “기뻐해도 무시당했어요”
- “감정 표현은 약하다는 뜻이었어요”
이처럼 감정이 억제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신이 겪은 상처를 자각하지 못한 채 자녀를 동일한 방식으로 대하게 됩니다.
4.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 감정이 금기인 아이로 자라다
정서적 회피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감정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됩니다. 다음은 그들이 겪는 흔한 문제들입니다:
① 자기감정 인식의 어려움
아이들은 스스로 “지금 내가 왜 화나는지”, “왜 슬픈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감정을 느껴도 그걸 이해하거나 언어로 표현할 경험이 부족합니다.
→ “기분이 안 좋은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② 감정 표현 억제
감정을 표현하면 혼나거나 무시당했던 경험 때문에, 기쁘거나 슬플 때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 “기쁜 일이 있어도 티내면 민망해서 그냥 넘겨요.”
③ 애착 문제
정서적 회피 부모는 아이의 감정에 충분히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는 정서적 안정감과 신뢰를 갖기 어려워집니다.
→ 가까운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도 거리감을 유지하거나, 반대로 과도하게 집착하게 됨
④ 낮은 자존감
감정이 인정받지 못한 경험은 곧 자기 존재가 충분히 존중받지 못했다는 메시지로 작용합니다.
→ “내가 뭘 느끼든 별로 중요하지 않아”라는 생각으로 이어짐
5. 상담 사례로 보는 정서적 회피의 영향
사례 ① 중학생 은서(가명): 엄마는 무표정한 벽 같았어요
은서는 친구와 잘 어울리지 못하고, 감정 기복이 적은 편이었습니다. 상담 중 “엄마는 나한테 한 번도 ‘기뻐’하거나 ‘속상해’ 같은 말을 안 했어요. 그냥 무표정이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은서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부모의 불화 속에서 자랐고,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된다”는 태도로 살아왔습니다. 자녀가 울면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왜 그런 걸로 우냐”고 했고, 웃거나 기뻐해도 “좋은 티 내지 마”라며 자제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은서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학습했고, 타인의 감정에도 둔감해졌습니다.
사례 ② 고등학생 민준(가명): 내 기분이 중요한 적은 없었어요
민준은 성적이 우수했지만 늘 긴장하고 자책이 심한 학생이었습니다. 상담 중 “엄마는 늘 내 기분보다 결과만 봐요. 오늘 우울했는지, 짜증났는지는 아무도 몰라요.”라고 말했습니다.
민준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가난과 부모의 이혼을 겪고, 살아남기 위해 ‘감정은 사치’라는 태도를 채택했습니다. 자녀에게도 “참아야 한다”, “무조건 견뎌야 한다”는 메시지를 반복했고, 민준은 자신의 감정을 내면에 억누른 채 스스로를 압박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6. 전문가의 분석과 심리학적 배경
📘 다니엘 시겔 (Daniel Siegel)
정서적 회피 부모의 특징을 분석하며,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이의 감정도 읽어줄 수 없다. 감정은 ‘공명’될 때 의미가 생긴다.”
라고 말합니다.
📘 Fonagy & Target (2002)
반영적 기능(reflective functioning)이 낮은 부모는 자녀의 감정을 해석하거나 의미화하지 못한다고 설명하며,
이는 아이의 자기 이해 능력과 정서 조절 능력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지적합니다.
7. 대물림을 끊는 실천 단계
정서적 회피는 습관이자 방어기제입니다. 바꾸기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1) 감정 이름 붙이기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먼저 말로 표현하는 연습을 합니다.
예: “오늘 나는 외로웠어”, “짜증이 났지만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
2) 아이의 감정 그대로 받아주기
아이가 울거나 화낼 때, 분석하거나 훈계하지 말고 감정을 그냥 수용합니다.
예: “그랬구나, 속상했겠다.”
3) 공감 대화의 시간 정하기
매일 10분, 감정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성과 중심 대화가 아닌 감정 중심 대화입니다.
예: “오늘 하루 중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은?”
4) 부모 자신의 상담 또는 회복 과정 시작
정서적 회피는 내면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볼 때 회복됩니다. 상담, 독서, 부모 교육, 글쓰기 등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정리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8. 감정은 억제의 대상이 아니라, 연결의 언어다
정서적 회피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느끼게 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제하는 방식으로 살아온 부모의 내면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자녀는 감정을 통해 연결되고, 공감 속에서 자라납니다.
당신이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면,
자녀는 자신의 감정이 소중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청소년 상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녀 훈육, 나이에 따라 달라야 합니다 – 발달심리 기반 훈육법 (1) | 2025.04.13 |
---|---|
사춘기 딸과 아버지의 거리, 가까워질 수 있을까? (1) | 2025.04.12 |
“부모의 언어폭력, 아이 뇌와 마음을 망가뜨린다” (1) | 2025.04.11 |
사회성 없는 엄마, 혼자인 아이 – 관계를 피하는 부모의 그림자 (0) | 2025.04.10 |
“나는 못했지만 너는 잘해야 해”라는 말의 심리학적 함정 (0) | 2025.04.10 |
“학교·학원이 싫은 아이, 공부 거부 뒤에 숨은 진짜 감정 읽기” (2) | 2025.04.09 |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이렇게 변합니다” – 부모라면 꼭 알아야 할 차이 (0) | 2025.04.08 |
"숙제해!"가 통하지 않는 이유, 말투만 바꿔도 아이가 달라집니다 (0) | 2025.04.08 |